아케치 히데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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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케치 히데미쓰는 16세기 일본의 무장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이었다. 그는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하는 데 선봉으로 참여했고,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패배하자 사카모토 성에서 자결했다. 비와호를 말을 타고 건넜다는 전설이 있으며, 다양한 출신 설과 덴카이 동일인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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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치 미쓰히데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나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으며, 전략과 행정에 능하고 문화적 교양도 뛰어났지만 야마자키 전투에서 패배 후 살해당해 그의 삶과 죽음은 역사적 논쟁과 창작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 아케치씨 - 호소카와 가라샤
호소카와 가라샤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태어나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결혼하였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남편의 보호 아래 신앙을 지키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인질이 되려 하자 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 미노국 사람 - 아케치 미쓰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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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보우치 쇼요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극작가, 문학평론가, 번역가로서, 『소설신수』를 통해 일본 근대 문학에 기여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신극 운동을 이끌었으며 셰익스피어 전 작품 번역을 완료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 1536년 출생 - 송응창
송응창은 명나라 관료로서 임진왜란 때 경략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평양 수복에 기여했으나, 석성과의 갈등과 당쟁으로 은퇴 후 《경략복국요편》을 저술했으며, 산동순무 시절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위엄 있는 인물이다. - 1536년 출생 - 삿사 나리마사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호쿠리쿠에서 공을 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다 항복 후 히고 국주로 임명되었지만 히고 국인 일기를 진압하지 못해 할복한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아케치 히데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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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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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로쿠로자에몬 |
출생 | 1536년 |
사망 | 1582년 7월 4일 |
출생지 | 미카와국 |
사망지 | 사카모토성 |
가문 | 미야케 씨(이설 있음)→아케치 씨 |
주군 | 아케치 미쓰히데 |
자녀 | 미야케 시게토시(이설 있음) |
가명 | 미야케 야헤이지 → 아케치 히데미쓰 (이설 있음) |
이명 | 미쓰하루, 미쓰토오, 히데토시, 미쓰토시, 미쓰마사 |
통칭 | 사마노스케 |
관직 | |
관직 | 후쿠치야마 성주 (1576년 - 1582년) |
군사 정보 | |
소속 | 오다 씨 아케치 씨 |
지휘 | 후쿠치야마성 |
참전 전투 | 단바 공략 (1575년) 혼노지의 변 (1582년) 야마자키 전투 (1582년) |
2. 생애
아케치 히데미쓰의 출생년에 관해서는 1536년 외 1535년설도 있다. 통칭은 미야케 야헤지, 아케치 사메노스케이다. 아버지 미야케 히데토모와 함께 아케치 미쓰히데를 모셨다. 부인은 미쓰히데의 차녀 가와테이다. 가와테는 처음 아라키 무라시게의 적자 무라쓰구에 시집을 가지만,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무라시게의 모반으로 이혼하고, 히데미쓰와 재혼한다. 이 즈음 아케치 씨로 개명한다.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아케치 군의 선봉으로 혼노지를 급습한다. 이 후 아즈치 성을 수비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전사하자 사카모토 성으로 이동해 미쓰히데의 가족을 죽인다, 그리고 성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자결한다. 비와호의 호수 위를 말로 건넜다는 [明智左馬助の湖水渡り(아케치 사메노스케(사마노스케)의 호수건너기)]란 전설이 남아있다.
일설에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묘로 있는 사카모토 사이쿄지에 히데미쓰의 묘가 없고, 과거에 기록에도 이름이 없기 때문에 히데미쓰가 사카모토 성에서 자결했다는 데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히데미쓰의 아들 미야케 시게토시는 데라가와 가타타카의 가신이 되었고, 아마쿠사 도미오카 성 조다이(성을 대리관리)를 지낸 바 있다. 이때 아마쿠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시게토시는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郎)가 이끄는 잇키 군을 진압했다고 전해진다.
아케치 히데미쓰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5년에서 1537년 사이 또는 늦어도 1557년에 태어났다. 히데미쓰는 도야마 가게유키 (묘치 성의 성주)와 미야케 다카사다 (미카와 국 히로세 성의 성주)의 아들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야마 가게하루(통칭 로쿠로자에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친족을 계승하여 미야케 야헤이지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과 결혼하여 아케치 히데미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 1. 출신과 초기 생애
아케치 히데미쓰의 출생년에 대해서는 1536년 외 1535년 설도 있다.[2][3][4][5][6] 통칭은 미야케 야헤지, 아케치 사메노스케이다. 아버지 미야케 히데토모와 함께 아케치 미쓰히데를 모셨다. 부인은 미쓰히데의 차녀 가와테이다. 가와테는 처음 아라키 무라시게의 적자 무라쓰구에 시집을 가지만,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무라시게의 모반으로 이혼하고, 히데미쓰와 재혼한다. 이 즈음 아케치 씨로 개명한다.]
히데미쓰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 아케치 씨 설: 『아케치 군기』 등에 따르면, 히데미쓰는 아케치 씨 출신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의 숙부인 아케치 미쓰야스의 아들(「아케치 씨 일족 미야기 가문 상전 계도서」에 따르면 차남)이며, 미쓰히데와는 사촌 관계였다고 한다. 다른 호로 미야케 씨를 칭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사이쿄지 소장 아케치 계도에 따르면, 실제로 아케치 미쓰하루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고, 계도찬요 또는 아케치 군기의 이름이며, 아케치 미쓰하루의 정식 이름은 아케치 미쓰토시라고 한다.
- 도야마 씨 설: 메이지 시대에 아베 나오스케에 의해 등사 교정된 『에나총서』에 따르면, 아케치 미쓰하루(히데미쓰)의 아버지인 미쓰야스가 미노국아케치성의 성주인 도야마 가게유키와 동일 인물로 여겨지며, 이를 참고하여 도야마 가게유키의 아들인 도야마 가게겐이 아케치 미쓰하루와 동일 인물이며, 아케치 미쓰하루가 히데미쓰가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었다. 도야마 가게겐은 겐키 원년(1570년)의 가미무라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이 설에 따르면 사료의 불일치도 있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도야마 가게유키의 아내가 미카와국히로세성 성주 미야케 타카사다의 딸이기 때문에, 도야마 가게겐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미야케 씨의 뒤를 이었다는 보충 설명도 있다.
- 미야케 씨 설: 히데미쓰는 처음에는 미야케 씨(미야케 야헤이지)를 칭했다. 미야케 씨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으로서 여러 이름이 확인된다. 또한 속설에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숙부로 여겨지는 아케치 미쓰카도가 미야케 조칸사이로 불렸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미야케 이즈모, 혹은 미노의 칠공의 아들, 고지마 다카노리의 자손이라고 칭한 비젠 국고지마 군조잔의 국인·미야케 도쿠오키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츠치다 씨 설: 이코마 요시노의 첫 번째 남편으로, 나가라가와 전투의 지원 전투인 아케치성 농성전에서 전사한 츠치다 야헤이지가 몰래 살아남아 미야케 야헤이지가 되었다는 설. 이코마가의 가계도는 큐안(요시노) 항목에 "처음 모 야헤이지에게 시집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츠치다라는 성씨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인물은 후에 아케치 미츠히데의 사위가 된 미야케 야헤이지(아케치 히데미츠)이며, 이 가계도가 꺼려하여 그 성을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이코마가의 자손이 말하고 있다.
- 기타: 『호소카와 가기』에는 칠장이의 아들이라고 쓰여 있으며, 『무공잡기』에서는 백은장인의 아들이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어느 쪽도 신뢰할 수 없다.
고지 2년(1556년), 사이토 도산과 사이토 요시타츠의 싸움에서 도산 측에 가담했던 히데미쓰의 아버지는 요시타츠 측에 공격받아 자결했지만, 히데미쓰는 아케치 미쓰히데 등과 함께 성을 탈출하여 낭인이 되었다고 한다.
2. 2.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
아케치 히데미쓰는 통칭 미야케 야헤지, 아케치 사메노스케로 불렸으며, 아버지 미야케 히데토모와 함께 아케치 미쓰히데를 섬겼다. 부인은 미쓰히데의 차녀 가와테로, 아라키 무라시게의 아들 아라키 무라쓰구와 이혼 후 히데미쓰와 재혼하였다. 이 무렵 아케치 씨로 개명하였다. 히데미쓰는 미쓰히데의 딸과 결혼 후 깊은 신뢰를 받아 아케치 군대의 선봉에서 자주 복무했다.[1]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섰다.[1] 이후 아즈치성을 방어하다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패하자, 사카모토 성으로 이동해 미쓰히데의 가족을 죽이고 성에 불을 지른 뒤 자결하였다. 야마자키 전투이후 그는 "오카게"라는 말을 타고 오쓰에서 사카모토 성까지 비와 호를 빠르게 건너는 것으로 전설이 되었다.[1] 이 장면은 많은 일본 예술 작품에 자주 묘사된다.[1]
비와호를 말을 타고 건넜다는 [明智左馬助の湖水渡り(아케치 사메노스케(사마노스케)의 호수건너기)] 전설이 남아있지만, 사카모토 사이쿄지에 히데미쓰의 묘가 없고 과거 기록에도 이름이 없어, 그가 사카모토 성에서 자결했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많다.
사카모토 성에서 아케치 일족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히데미쓰의 아들 미야케 시게토시는 살아남았다.[1] 미야케 시게토시는 데라가와 가타타카의 가신이 되었고, 아마쿠사의 난에서 아마쿠사 시로가 이끄는 잇키 군을 진압했다고 전해진다.

2. 3. 야마자키 전투와 최후
아케치 히데미쓰는 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할 때 선봉을 맡았으며, 아즈치 성을 수비했다.[1] 야마자키 전투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미쓰히데가 패배하자, 히데미쓰는 사카모토 성으로 이동했다.[1] 그는 비와 호를 말을 타고 건넜다는 "아케치 사마노스케(사마노스케)의 호수 건너기"라는 전설을 남겼다.[1] 이 장면은 많은 일본 예술 작품에 자주 묘사된다.[1]호리 히데마사가 사카모토 성을 포위하자, 히데미쓰는 잠시 방어했지만, 쿠니유키의 칼·깃코의 옆구리 칼·허당의 묵적등의 명물이 없어질 것을 두려워 호리 히데마사의 일족인 호리 나오마사에게 보냈다.[1] 히데미쓰는 미쓰히데가 비장해둔 고요시히로의 옆구리 칼은 죽음의 산에서 미쓰히데에게 건네주기 위해 자신이 허리에 차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사카모토 성에 불을 지르고[1] 미쓰히데의 처자를 찔러 죽이고 자신의 아내도 찔러 죽인 후, 할복하여 화약을 터뜨려 자살했다.[1] 그의 행위는 전국 무장의 미학을 구현한 듯한 것으로, 적군도 칭찬하고 있다.[1]
3. 이설과 평가
아케치 미쓰히데와 사촌관계로 있는 아케치 미쓰하루와 혼동되기도 한다. 히데미쓰는 아케치 후다이 가신인 미야케씨 출신이다. 기후현 미나 시 아케치 정에서는 아케치 성 성주 도야마 가게하루를 아케치 미쓰하루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히데미쓰와 미쓰하루를 동일인으로 보는 설이 있어, 이를 비약하면 도야마 가게하루는 히데미쓰라고 할 수 있다.
아케치 미쓰히데를 에도 시대 초기의 승려 덴카이(天海)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지만, 히데미쓰를 덴카이로 보는 설도 있다. 덴카이의 출신이 오슈이지만, 사용한 문장이 도야마 씨 문장, 아케치 가문과 같기 때문에 도야마 가게하루가 덴카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고,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없다.
히데미쓰는 '사마노스케 아케치'라는 이름으로 오니무샤 시리즈에 등장한다. 오니무샤 3: Demon Siege 이후, 오니무샤: Dawn of Dreams에서 덴카이 난코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사마노스케"(左馬之介)는 히데미쓰가 조정에서 사용하던 자(字)였다.
아케치 히데미쓰는 가메야마성을 출발하기 전에 모반을 일으킬 결의를 알렸고, 일동이 침묵하는 가운데 먼저 이를 승낙하여 다른 사람들도 승낙하게 되었다고 한다(『노부나가기』).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히데미쓰는 처음에 모반을 간언 받았으나, 결국 모반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아즈치성 퇴거 당시 히데미쓰 군이 천수각이나 혼마루에 방화했다는 설이 있으나, 프로이스의 서한에 따르면 오다 노부오가 불태웠다고 한다. 가네미경경에 아즈치성의 소실이 15일의 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즈치성을 불태운 것은 히데미쓰가 아니라 노부오일 가능성이 크다.
비와호를 말로 건넜다는 "아케치 사마노스케의 호수 건너기" 전설이 있다. 히데미쓰는 패사 후 사카모토로 철수하려다 오쓰에서 호리 히데마사의 병사들과 마주쳤고, 명마를 타고 호수를 건넜다고 한다. 이 일화는 『가와스미 태합기』에 처음 등장하지만, 진위는 불명이다. 사실은 오쓰의 거리와 호수 사이의 길을 기마로 달려 나갔다는 것이 진실인 듯하다.
사카모토성이 포위되어 멸망이 임박했을 때, 히데미쓰는 가장 먼저 성에 들어가려던 무사 이리에 쵸헤이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금 300냥을 주었다는 일화가 『무가사기』에 전해진다. 또한, 히데요시 측의 호리 히데마사에게 비장한 명기를 넘겨주었다는 이야기가 우타가와 요시토라의 우키요에 "[https://www.touken-world-ukiyoe.jp/mushae/art0011510/ 오쓰 사카모토 성 명도 그림]"에 그려져 있으며, 『태합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히데미쓰는 쓰다 소큐를 초대하여 다회를 열었고, 향응역을 맡는 등 문화인으로서의 지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소큐기』).
히데미쓰가 착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칼이 "아케치 코시라에"로 현재 전해지고 있으며, 칼날과 외장 모두 현존한다(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이 칼은 간소한 코시라에지만, 이 시대의 실용 칼의 양식을 전하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여겨진다.
3. 1. 덴카이 동일인설
아케치 미쓰히데와 사촌관계로 있는 아케치 미쓰하루와 혼동되기도 한다. 히데미쓰는 아케치 후다이 가신인 미야케씨 출신이다. 기후현 미나 시 아케치 정에서는 아케치 성 성주 도야마 가게하루를 아케치 미쓰하루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히데미쓰와 미쓰하루를 동일인으로 보는 설이 있어, 이를 비약하면 도야마 가게하루는 히데미쓰라고 할 수 있다.아케치 미쓰히데를 에도 시대 초기의 승려 덴카이(天海)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지만, 히데미쓰를 덴카이로 보는 설도 있다. 덴카이의 출신이 오슈이지만, 사용한 문장이 도야마 씨 문장, 아케치 가문과 같기 때문에 도야마 가게하루가 덴카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고,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없다.
히데미쓰는 '사마노스케 아케치'라는 이름으로 오니무샤 시리즈에 등장한다. 오니무샤 3: Demon Siege 이후, 오니무샤: Dawn of Dreams에서 덴카이 난코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사마노스케"(左馬之介)는 히데미쓰가 조정에서 사용하던 자(字)였다.
3. 2. 미쓰하루와의 혼동
아케치 미쓰히데와 사촌관계로 있는 아케치 미쓰하루와 혼동되기도 한다.[4] 히데미쓰는 아케치 후다이 가신인 미야케씨 출신이다.[2] 기후현 미나 시 아케치 정에서는 아케치 성 장수 도야마 가게하루를 아케치 미쓰하루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히데미쓰와 미쓰하루를 동일인으로 보는 설이 있어, 이를 비약하면 도야마 가게하루는 히데미쓰라고 말할 수도 있다.아케치 미쓰히데를 에도 초기의 승려 덴카이(天海)로 보는 설이 있지만, 히데미쓰도 덴카이로 보는 설도 있다. 덴카이의 출신이 오슈지만, 사용한 가몬은 도야마 씨 가몬, 아케치 가문과 같기 때문에 도야마 가게하루가 덴카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며,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없다.
동시대 사료에 나오는 실명(휘)은 '''히데미쓰'''이며, 처음에는 '''미야케 야헤이지'''라고 칭했고[2], 나중에는 '''아케치 야헤이지'''라고도 칭했다[3]。'''사마노스케'''(左馬助)(사마노스케(左馬之助))라는 통칭도 유명하다[5]。
3. 3. 평가
아케치 히데미쓰는 가메야마성을 출발하기 전에 모반을 일으킬 결의를 알렸고, 일동이 침묵하는 가운데 먼저 이를 승낙하여 다른 사람들도 승낙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히데미쓰는 처음에 모반을 간언 받았으나, 결국 모반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아즈치성 퇴거 당시 히데미쓰 군이 천수각이나 혼마루에 방화했다는 설이 있으나, 프로이스의 서한에 따르면 오다 노부오가 불태웠다고 한다. 가네미경경에 아즈치성의 소실이 15일의 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즈치성을 불태운 것은 히데미쓰가 아니라 노부오일 가능성이 크다.
비와호를 말로 건넜다는 "아케치 사마노스케의 호수 건너기" 전설이 있다. 히데미쓰는 패사 후 사카모토로 철수하려다 오쓰에서 호리 히데마사의 병사들과 마주쳤고, 명마를 타고 호수를 건넜다고 한다. 이 일화는 『가와스미 태합기』에 처음 등장하지만, 진위는 불명이다. 사실은 오쓰의 거리와 호수 사이의 길을 기마로 달려 나갔다는 것이 진실인 듯하다.
사카모토성이 포위되어 멸망이 임박했을 때, 히데미쓰는 가장 먼저 성에 들어가려던 무사 이리에 쵸헤이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금 300냥을 주었다는 일화가 『무가사기』에 전해진다. 또한, 히데요시 측의 호리 히데마사에게 비장한 명기를 넘겨주었다는 이야기가 우타가와 요시토라의 우키요에 "[https://www.touken-world-ukiyoe.jp/mushae/art0011510/ 오쓰 사카모토 성 명도 그림]"에 그려져 있으며, 『태합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히데미쓰는 쓰다 소큐를 초대하여 다회를 열었고, 향응역을 맡는 등 문화인으로서의 지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소큐기』).
히데미쓰가 착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칼이 "아케치 코시라에"로 현재 전해지고 있으며, 칼날과 외장 모두 현존한다(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10]). 이 칼은 간소한 코시라에지만, 이 시대의 실용 칼의 양식을 전하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여겨진다.[11]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2]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2009
[3]
문서
天王寺屋会記
[4]
문서
明智軍記
[5]
문서
信長公記
[6]
문서
明智氏一族宮城家相伝系図書
[7]
논문
中世城郭研究論集
新人物往来社
[8]
간행물
福知山市史
天寧寺所蔵
[9]
웹사이트
島原の乱に関係のあった三宅重利(藤兵衛)の石高や来歴を知りたい。(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国立国会図書館)
https://crd.ndl.go.j[...]
[10]
웹사이트
溜塗打刀(明智拵)
https://bunka.nii.ac[...]
文化遺産オンライン
2023-01-20
[11]
서적
刀剣
保育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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